제 2차 항마전쟁은 거의 마족간의 동족상잔이었다. 사브라니구드의 조각 두 개를 찾아낸 마족들은 봉인을 한꺼번에 푸는 문제에 대해 대립하기 시작했고, 처음에 반기를 든 것은 수왕이었다. 명왕부와 마룡왕부가 소멸해버린 이 시점에서 수왕부의 반기란 것은 마족측에 있어선 실로 엄청난 타격이었다. 게다가 마족의 세력이 다시 커지는 것을 우려한 신족들이 끼어 들었다. 마족은 양분된 세력으로 그들을 맞아 싸워야만 했다. 신족들이 그렇게까지 위협적인 존재들이 되진 못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약해진 전력으로 싸우기엔 좀 벅찬 상대였다. 마족은 상당한 희생을 치뤄가며 신족측의 세력을 거의 꺾어놓고는 다시 서로간의 전쟁을 치루기 시작했다. 전쟁의 양산은 난전이 되어가고 있었다.
먼 하늘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마치 불꽃놀이처럼 하늘을 밝히던 그 빛은, 나타났던 것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 느낄 여유따윈 없었다. 지금은 전쟁중이었다. 연한 금발머리가 불빛에 빛났다. 그는 서서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불빛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잠시 드러났다 곧 어두워졌다.
그다지 먼곳은 아니었기에 그는 얼마 안 있어 그 전투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엔 엄청난 에너지가 부딪힌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희뿌연한 빛의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그 안개는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반딧불의 무리라고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있는 인간모습의 무언가는 그도 익히 알고 있던 존재였다. 그는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무표정하던 얼굴에 잠시 감정이 나타났다. 증오, 혹은 안타까움. 빛의 안개속에 널부러져 있던 검은빛의 남자의 모습은 상당히 처참했다. 가슴 부근은 마치 날카로운 갈고리로 북북 긁어놓은 듯이 엉망이 되어 찢겨 있었고, 배 쪽엔 사람머리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한마디로 인간이었다면 이미 즉사했을 상처였다. 그러나 그 남자는 인기척에 고개를 쳐들고는 곧 금발의 검사를 발견했다.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인가?) 남자의 얼굴에 잠시 놀라움이 스쳐지나가더니, 바로 방실방실 웃기 시작했다. ...뭐, 웃는 걸 보아하니 절대로 중상을 당한 부상자가 아니다, 저것은.
"야아- 가우리씨 아니세요. 오랜만의 재회인데, 이런 꼴을 보여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곳에서 뭐하세요?"
마치 지나가다가 아는 사람을 발견한 듯한 말투다. 일어나지도 못하는 주제에 연신 방실거리는 것도 긴장감이란 것을 상실시키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땀 한 방울 안 흘린다면 그건 미르가지아씨다. 검사는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곧 남자를 추스려 안아들었다.
"어어- 뭐하시는 건가요?"
남자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곧이어 검사의 말이 이어졌다.
"너 다쳤잖아... 보니까 공간이동도 안 되는 것 같은데. 놔두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남자는 버둥거리기를 포기하고는 얌전히 아기처럼 검사의 팔에 안겨들었다. 그리고 낮게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당신이라니... 우린 서로 운이 없군요."
그리곤, 곧 정신체의 회복을 위해 세계에 구현하던 끈을 놓아버렸다. 쉽게 설명하자면 기절했다고 할수 있겠다...
탁... 타닥...
어디에선가 규칙적인 파열음이 들려왔다. 보라색 단발머리의 남자는 눈을 뜨고 살짝 고개를 돌려보았다. 잠시 쉰 덕인지 몸은 많이 복구되어 있었다. 곧 검사의 옆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가 피워놓은 모닥불도. 자신의 위에 그의 옷이 덮혀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에겐 이런 것이 쓸모 없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아니면...
남자는 물끄러미 검사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약간 그을은 구릿빛의 피부, 그와는 대조적으로 흰빛이 돌 정도의 금발머리. 무엇보다도 무표정한 그 얼굴. 절대로 그답지 않았다. 절 . 대 . 로.
검사의 모습은... 이상할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아, 일어났네 제로스."
검사가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로스는 일어나 앉으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개의치 않고는 그에게 굽고있던 고구마를 내밀었다.
"먹을래?"
"가우리님... 당신..."
"응?"
분명히 웃는 얼굴이다. 밝은, 얼핏보면 전과 다를 바 없다라고 생각될 정도의 웃는. 그러나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그림자는 무얼 뜻하는 것일까.
"리나님은요?"
잠시 공기가 얼어붙는 듯 했다. 가우리는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제로스는 그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아니, 들어야 했다.
"제르가디스님과 아멜리아님은요? 당신들, 사이좋은 4인조 아니었나요?"
제로스의 말투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리나는... 떠났어. 제르가디스랑. 날 버리고. 아멜리아는 세이룬으로 돌아갔고."
가우리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모닥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은 불빛으로 붉게 물들어 더 깊어 보였다. 제로스는 뭔가가 신경을 긁는 것을 알아차렸다. 스물스물. 불쾌함이 전신을 싸고돌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애가 날 잘라냈지. 하지만 알아. 그 애, 속으로 울고 있었던 거. ...난 알 수 있어. 그 애의 맘이 변한 게 아냐. 날 죽이고 싶지 않는 거지. 저번의 해장군과의 전투에서 내가 죽을뻔 했으니까. 리자렉션도 소용없다고 하던데. 3일동안 혼수상태였었다고. 말 그대로 죽기 직전에 살아 돌아온 셈이었지."
가우리는 제로스를 돌아보며 살짝 미소지었다. 밑도 끝도 없는 공허한 미소. 제로스는 그 불쾌감의 이유를 깨달았다. 인간이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건. -기.분.나.빠. 마치 거울을 보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인간주제에. 절망으로 점철되어 있는데다가 건방지게도 그 마이너스 감정을 안으로 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인간은.
"목 마르지 않아?"
가우리는 제로스쪽으로 수통을 내밀었다. 제로스는 잠시 내민 손을 바라보고는 단호한 몸짓으로 거절했다.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대로, 보내버린 겁니까?"
가우리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낮게 웅얼거리는 소리는 천천히 어두운 숲 속으로 퍼져나갔다.
"우습게도, 리나가 뭐라고 말하는지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 아멜리아가 울고 있었거든. 제르가디스는 이를 악물고 돌아서 있었어. 그가 어깨를 떠는 게 눈에 들어왔지. 리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난 말이야... 한가지밖에 생각나지 않더라구. 빨리 이 상황을 수습해야겠다구."
"가우리님."
"그래서 우는 아멜리아를 달래서 데리고 떠났지. 리나쪽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응... 리나가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나. 분명히 뭐라 그랬는데..."
골똘히 그 말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모습이다.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당신은, 어째서 웃고있는 겁니까!!!"
결국 제로스는 소릴 질러버렸다. 가우리는 놀란 눈으로 제로스를 쳐다보았다. 제로스의 얼굴에서 보여지는 것은 질투라기에는 너무나도 커다란 분노. 살기였다.
"아까 당신의 정신세계를 잠시 볼 수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더군요. 인간이 그정도로 정신을 파괴하고도 살아있는 것은, 아직까지 단 한번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당신, 어떻게 된겁니까."
이미 접대용 미소는 치워 버린지 오래. 제로스의 얼굴에서는 적의조차 읽혀질 정도였다.
"난 망각의 축복을 부여받았지."
"-!"
망각의 축복. 죽어가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걸 수 있는 주술. 혹은 저주. 자신의 생명과 바꾸어 실행시키는 금단의 술법. 그 저주의 대상자는 평생토록 망각의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가게 된다. 자신의 지인들을 하나둘씩 잃어가며.
...그가 ... 그것에 걸려 있었다고?
"용병생활 하다 만났던 어떤 사람이 나에게 그 축복을 내렸지. 그래서 아직 살아있는 거야.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붉은 빛만은...
"가우리님... 당신은..."
모닥불을 보는 가우리의 얼굴은 한가롭다. 아니, 지루해 보이기조차 한다. 관심없는 남의 얘기를 하듯, 그는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타닥...
모닥불이 잠시 거세게 타올랐다.
"잊어버릴 수 있다는 건 어떤 의미론 얼마만큼의 축복인지... 그렇지 못했다면 아마 용병생활 하다가 미쳐버렸을 꺼야. 내가 몇 명이나 죽였을 거라고 생각하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어두운 숲 속엔 이상할 정도로 생물체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어느사이엔가 풀벌레의 울음도 그쳐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여 준거라고요?"
"제로스?"
가우리는 제로스쪽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미소를 띈 그의 얼굴을 보고는 제로스는 마치 피를 토해내듯 격렬하게 외쳤다.
"웃지 마세요! 구역질납니다."
"......"
"앞으로 어쩔 생각인거죠? 그 잘난 용병생활로 돌아가서, 사람을 죽여가면서 살겠다고요? 당신이? 그녀의 사랑을 독차지한 당신이?"
제로스는 비웃고 있었다. 가우리를, 그리고 자기자신을.
"그래, 그녀가 없이 살아갈 수 있어요? 생각해 봐요. 평생동안 리나님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자신이 있습니까?"
"그만... 해..."
알고 있다. 질투. 절대로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지치지 않는 갈망.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후회속에 살아나간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알고나 있느냐구요!"
"나도 알고있어!"
순간, 가우리의 가면이 벗겨졌다. 그는 갑자기 상처입은 짐승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인에게 달려갔다가 이유없는 발길질에 채여버린 개. 제로스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그의 얼굴에 잠시 나타난 감정은 틀림없는 만족감.
"나도 알고는 있어. 이 삼개월동안 잠시도 후회해보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하지만 난 이대로 살아간다. 그 애를 위해서. 그 애가 내가 살기를 원하니깐."
둘의 시선이 교차된다. 한쪽의 시선은 미묘한 갈등. -이미 결정되어버린 상황에 대한.
또 한쪽의 시선은 약간의 경멸과 어느 정도의 예우. 혹은... 동질감.
잠시 시간이 멈춘다. 제로스는 가우리의 눈을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이 솟구치는군.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한번도 내 페이스대로 밀고나갈 수 있었던 적이 없었지.
"당신은 정말 바보군요."
툭툭. 제로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더 이상은 꾸물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힘은 거의 다 되돌아 왔고. 아마 수왕님은 고요히 분노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자신의 아들이 하루종일 연락두절이었으니. 어쨌든, 그에겐 해둘 말이 있었다. 그가 납득하건 안하건 간에.
"나라면 이러지 않아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버릴 겁니다. 정말이에요! 자신도 있다구요. 리나님은 내껍니다. 손대는 자는 용서 못해요."
"너야말로 바보야 제로스."
그애라면, 구속되느니 차라리 죽어버릴 테니까.
가우리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마족인 수신관은 가끔씩 의외의 면을 보여주곤 했었다. 자신도 의식 못하면서. 귀엽게도.
제로스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당신은 나를 걱정해 주었었지요. 마족이란 것을 안 후로도 태도가 변치 않은 것은 당신뿐이었습니다."
"...그랬던가..."
가우리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아까와는 다른, 조금은 기쁜듯한 미소가.
"그것에 대한 답례로, 오늘은 당신께 어떤 해도 끼치지 않고 돌아가겠습니다."
"그건 정말로 고마운데."
어차피 이 이상의 연극은 필요 없다.
"다음엔 뵙지 않게 되길 바라요. 죽여버릴지도 모르니까."
"그것 참... 기대되는 걸..."
제로스는 다시 방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가우리를 향해 방긋 웃어주고는 스르륵 어둠속으로 녹아 내렸다. 가우리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하늘엔 별들이 그들을 훔쳐본다. 숲 속의 밤이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먼 하늘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마치 불꽃놀이처럼 하늘을 밝히던 그 빛은, 나타났던 것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 느낄 여유따윈 없었다. 지금은 전쟁중이었다. 연한 금발머리가 불빛에 빛났다. 그는 서서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불빛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잠시 드러났다 곧 어두워졌다.
그다지 먼곳은 아니었기에 그는 얼마 안 있어 그 전투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엔 엄청난 에너지가 부딪힌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희뿌연한 빛의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그 안개는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반딧불의 무리라고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있는 인간모습의 무언가는 그도 익히 알고 있던 존재였다. 그는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무표정하던 얼굴에 잠시 감정이 나타났다. 증오, 혹은 안타까움. 빛의 안개속에 널부러져 있던 검은빛의 남자의 모습은 상당히 처참했다. 가슴 부근은 마치 날카로운 갈고리로 북북 긁어놓은 듯이 엉망이 되어 찢겨 있었고, 배 쪽엔 사람머리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한마디로 인간이었다면 이미 즉사했을 상처였다. 그러나 그 남자는 인기척에 고개를 쳐들고는 곧 금발의 검사를 발견했다.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인가?) 남자의 얼굴에 잠시 놀라움이 스쳐지나가더니, 바로 방실방실 웃기 시작했다. ...뭐, 웃는 걸 보아하니 절대로 중상을 당한 부상자가 아니다, 저것은.
"야아- 가우리씨 아니세요. 오랜만의 재회인데, 이런 꼴을 보여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곳에서 뭐하세요?"
마치 지나가다가 아는 사람을 발견한 듯한 말투다. 일어나지도 못하는 주제에 연신 방실거리는 것도 긴장감이란 것을 상실시키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땀 한 방울 안 흘린다면 그건 미르가지아씨다. 검사는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곧 남자를 추스려 안아들었다.
"어어- 뭐하시는 건가요?"
남자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곧이어 검사의 말이 이어졌다.
"너 다쳤잖아... 보니까 공간이동도 안 되는 것 같은데. 놔두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남자는 버둥거리기를 포기하고는 얌전히 아기처럼 검사의 팔에 안겨들었다. 그리고 낮게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당신이라니... 우린 서로 운이 없군요."
그리곤, 곧 정신체의 회복을 위해 세계에 구현하던 끈을 놓아버렸다. 쉽게 설명하자면 기절했다고 할수 있겠다...
탁... 타닥...
어디에선가 규칙적인 파열음이 들려왔다. 보라색 단발머리의 남자는 눈을 뜨고 살짝 고개를 돌려보았다. 잠시 쉰 덕인지 몸은 많이 복구되어 있었다. 곧 검사의 옆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가 피워놓은 모닥불도. 자신의 위에 그의 옷이 덮혀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에겐 이런 것이 쓸모 없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아니면...
남자는 물끄러미 검사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약간 그을은 구릿빛의 피부, 그와는 대조적으로 흰빛이 돌 정도의 금발머리. 무엇보다도 무표정한 그 얼굴. 절대로 그답지 않았다. 절 . 대 . 로.
검사의 모습은... 이상할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아, 일어났네 제로스."
검사가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로스는 일어나 앉으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개의치 않고는 그에게 굽고있던 고구마를 내밀었다.
"먹을래?"
"가우리님... 당신..."
"응?"
분명히 웃는 얼굴이다. 밝은, 얼핏보면 전과 다를 바 없다라고 생각될 정도의 웃는. 그러나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그림자는 무얼 뜻하는 것일까.
"리나님은요?"
잠시 공기가 얼어붙는 듯 했다. 가우리는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제로스는 그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아니, 들어야 했다.
"제르가디스님과 아멜리아님은요? 당신들, 사이좋은 4인조 아니었나요?"
제로스의 말투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리나는... 떠났어. 제르가디스랑. 날 버리고. 아멜리아는 세이룬으로 돌아갔고."
가우리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모닥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은 불빛으로 붉게 물들어 더 깊어 보였다. 제로스는 뭔가가 신경을 긁는 것을 알아차렸다. 스물스물. 불쾌함이 전신을 싸고돌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애가 날 잘라냈지. 하지만 알아. 그 애, 속으로 울고 있었던 거. ...난 알 수 있어. 그 애의 맘이 변한 게 아냐. 날 죽이고 싶지 않는 거지. 저번의 해장군과의 전투에서 내가 죽을뻔 했으니까. 리자렉션도 소용없다고 하던데. 3일동안 혼수상태였었다고. 말 그대로 죽기 직전에 살아 돌아온 셈이었지."
가우리는 제로스를 돌아보며 살짝 미소지었다. 밑도 끝도 없는 공허한 미소. 제로스는 그 불쾌감의 이유를 깨달았다. 인간이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건. -기.분.나.빠. 마치 거울을 보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인간주제에. 절망으로 점철되어 있는데다가 건방지게도 그 마이너스 감정을 안으로 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인간은.
"목 마르지 않아?"
가우리는 제로스쪽으로 수통을 내밀었다. 제로스는 잠시 내민 손을 바라보고는 단호한 몸짓으로 거절했다.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대로, 보내버린 겁니까?"
가우리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낮게 웅얼거리는 소리는 천천히 어두운 숲 속으로 퍼져나갔다.
"우습게도, 리나가 뭐라고 말하는지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 아멜리아가 울고 있었거든. 제르가디스는 이를 악물고 돌아서 있었어. 그가 어깨를 떠는 게 눈에 들어왔지. 리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난 말이야... 한가지밖에 생각나지 않더라구. 빨리 이 상황을 수습해야겠다구."
"가우리님."
"그래서 우는 아멜리아를 달래서 데리고 떠났지. 리나쪽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응... 리나가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나. 분명히 뭐라 그랬는데..."
골똘히 그 말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모습이다.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당신은, 어째서 웃고있는 겁니까!!!"
결국 제로스는 소릴 질러버렸다. 가우리는 놀란 눈으로 제로스를 쳐다보았다. 제로스의 얼굴에서 보여지는 것은 질투라기에는 너무나도 커다란 분노. 살기였다.
"아까 당신의 정신세계를 잠시 볼 수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더군요. 인간이 그정도로 정신을 파괴하고도 살아있는 것은, 아직까지 단 한번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당신, 어떻게 된겁니까."
이미 접대용 미소는 치워 버린지 오래. 제로스의 얼굴에서는 적의조차 읽혀질 정도였다.
"난 망각의 축복을 부여받았지."
"-!"
망각의 축복. 죽어가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걸 수 있는 주술. 혹은 저주. 자신의 생명과 바꾸어 실행시키는 금단의 술법. 그 저주의 대상자는 평생토록 망각의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가게 된다. 자신의 지인들을 하나둘씩 잃어가며.
...그가 ... 그것에 걸려 있었다고?
"용병생활 하다 만났던 어떤 사람이 나에게 그 축복을 내렸지. 그래서 아직 살아있는 거야.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붉은 빛만은...
"가우리님... 당신은..."
모닥불을 보는 가우리의 얼굴은 한가롭다. 아니, 지루해 보이기조차 한다. 관심없는 남의 얘기를 하듯, 그는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타닥...
모닥불이 잠시 거세게 타올랐다.
"잊어버릴 수 있다는 건 어떤 의미론 얼마만큼의 축복인지... 그렇지 못했다면 아마 용병생활 하다가 미쳐버렸을 꺼야. 내가 몇 명이나 죽였을 거라고 생각하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어두운 숲 속엔 이상할 정도로 생물체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어느사이엔가 풀벌레의 울음도 그쳐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여 준거라고요?"
"제로스?"
가우리는 제로스쪽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미소를 띈 그의 얼굴을 보고는 제로스는 마치 피를 토해내듯 격렬하게 외쳤다.
"웃지 마세요! 구역질납니다."
"......"
"앞으로 어쩔 생각인거죠? 그 잘난 용병생활로 돌아가서, 사람을 죽여가면서 살겠다고요? 당신이? 그녀의 사랑을 독차지한 당신이?"
제로스는 비웃고 있었다. 가우리를, 그리고 자기자신을.
"그래, 그녀가 없이 살아갈 수 있어요? 생각해 봐요. 평생동안 리나님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자신이 있습니까?"
"그만... 해..."
알고 있다. 질투. 절대로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지치지 않는 갈망.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후회속에 살아나간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알고나 있느냐구요!"
"나도 알고있어!"
순간, 가우리의 가면이 벗겨졌다. 그는 갑자기 상처입은 짐승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인에게 달려갔다가 이유없는 발길질에 채여버린 개. 제로스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그의 얼굴에 잠시 나타난 감정은 틀림없는 만족감.
"나도 알고는 있어. 이 삼개월동안 잠시도 후회해보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하지만 난 이대로 살아간다. 그 애를 위해서. 그 애가 내가 살기를 원하니깐."
둘의 시선이 교차된다. 한쪽의 시선은 미묘한 갈등. -이미 결정되어버린 상황에 대한.
또 한쪽의 시선은 약간의 경멸과 어느 정도의 예우. 혹은... 동질감.
잠시 시간이 멈춘다. 제로스는 가우리의 눈을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이 솟구치는군.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한번도 내 페이스대로 밀고나갈 수 있었던 적이 없었지.
"당신은 정말 바보군요."
툭툭. 제로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더 이상은 꾸물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힘은 거의 다 되돌아 왔고. 아마 수왕님은 고요히 분노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자신의 아들이 하루종일 연락두절이었으니. 어쨌든, 그에겐 해둘 말이 있었다. 그가 납득하건 안하건 간에.
"나라면 이러지 않아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버릴 겁니다. 정말이에요! 자신도 있다구요. 리나님은 내껍니다. 손대는 자는 용서 못해요."
"너야말로 바보야 제로스."
그애라면, 구속되느니 차라리 죽어버릴 테니까.
가우리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마족인 수신관은 가끔씩 의외의 면을 보여주곤 했었다. 자신도 의식 못하면서. 귀엽게도.
제로스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당신은 나를 걱정해 주었었지요. 마족이란 것을 안 후로도 태도가 변치 않은 것은 당신뿐이었습니다."
"...그랬던가..."
가우리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아까와는 다른, 조금은 기쁜듯한 미소가.
"그것에 대한 답례로, 오늘은 당신께 어떤 해도 끼치지 않고 돌아가겠습니다."
"그건 정말로 고마운데."
어차피 이 이상의 연극은 필요 없다.
"다음엔 뵙지 않게 되길 바라요. 죽여버릴지도 모르니까."
"그것 참... 기대되는 걸..."
제로스는 다시 방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가우리를 향해 방긋 웃어주고는 스르륵 어둠속으로 녹아 내렸다. 가우리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하늘엔 별들이 그들을 훔쳐본다. 숲 속의 밤이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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